차은일
초등학교 일학년 다니는 아들 준이가 열심히 TV를 보고 있길래 “Do you enjoy your winter vacation? 겨울방학을 즐겁게 지내고 있니?” 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당연히 Yes라고 대답할 것을 기대했었습니다. 그런데 뜻 밖에 아이가 저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I don’t have a real vacation. Real vacation is like traveling somewhere. 아빠 저는 진짜 방학은 못가졌어요. 진짜 방학은 어디 여행을 가는 건데 아무데도 가지 못했잖아요.”
저는 아이들이 집 안에서 열심히 TV나 책을 보고, 컴퓨터도 하고 동생과 뒹굴며 놀기에 잘 놀고 있다고만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자신이 집에 틀어 박혀 만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처음 깨닫게 되는 순간 아빠로서의 저의 심정은 가슴이 찡하며 미안하다고 느꼈습니다.
어쩌면 이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 현실이 바로 우리 이민자들 대부분의 서글픈 처지라고 생각합니다. 뉴욕과 같은 대도시에서는 미국 온지 10년, 15년이 지났는데도 단 한번의 vacation을 가져 보지 못했다는 부부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 한 두시간 거리의 공원 조차도 갈 수 없는 이민자들의 비극적인 생활도 많이 보았었습니다. 우리 가까이 산타바바라의 이민자 중에도 부모가 일하는 가게 한 구석에서 부모의 퇴근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13살 미만의 아이들도 있습니다.
이런 생각 속에서 제 자신의 연말을 뒤돌아 보았습니다. 꽤 바빴던 시간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과 한집에 있으면서도 제대로 놀아주지 못할 정도로 바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번 연말은 바뻤기에 더욱 감사한 그런 뜻 깊은 시간이었다고 믿습니다. 첫번째는 목회자로서 성도들의 아픔에 동참할 수 있어서 감사했고 두번째는 바쁠 수 있는 건강과 시간과 능력을 주심에 감사했습니다. 만약 내가 심각한 질병으로 쓰러져있거나 무능하여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불행한 것일 것입니다. 바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축복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런 대견(?)한 생각을 하게 된 데는 오랫동안 암으로 투병하시던 집사님 한 분이 연말 12월 31일에 천국으로 부르심을 받으시는 모습을 보면서 였습니다. 그 날 임종예배를 드린 후에 교회로 돌아와 송구영신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어느 해에 느낄 수 없었던 감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2003년을 또 주셨다는 것… 이것 만으로도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섬길 수 있는 교회와 성도들을 주셨다는 것 이것은 축복입니다. 그리고 바쁠 수 있는 일감과 현장을 주시고,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저를 사용해 주시고 있다는 사실..이것은 감격스러운 사명입니다.
그래서 이번 연말에 멋진 휴가를 가지 못했어도 어느 때보다도 감사하고 감격스러운 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