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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교나눔의 장

오페라 “이순신 “제작자 백기현교수 간증(펌)

2007-04-25 23:34:43 203
20년전 유학생 부인으로 이곳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했던 정은희집사님이 한국에서 국제전화로 저에게 알려준 공주대 음대 교수님이신 백기현 교수님의 다음 카페에 있는 간증문과 간증동영상을 보고 저만 알고 있기엔 너무나 귀하고 은혜스런 간증이어서 퍼왔습니다. 컴맹이라 동영상이 뜨는 것을 카피하지 못했는데 백기현 교수 간증과 찬양은 많은 교회의 웹사이트에 뜨더군요.
그분은 2살때 떨어져서 불치의 곱추가 된 후 5번이나 어머님의 동반자살 과정 등 어려운 과정
을 거쳐 곱추에 대한 열등감을 가리고 명예와 부를 축척하기 위해 창작 오페라(이순신.제작책임)사업하다 엄청난 부채를 진 인생 파탄 지경에서 2005년 2월4일(구정) 부흥회를 통해 주님의 인도함으로 곱추의 몸이 온전히 나아 주님을 증거하는 찬양 사역을 펼치고 있습니다.
아래주소를 클릭하면 광성교회에서 간증하신 것을 동영상으로 보실수 있습니다.

http://www.kwangsung.org/mboard/mboard.asp?exe=view&csno=&board_id=sermon2&group_name=church&idx_num=324&page=1&category=0&search_category=&search_word=&order_c=bd_idx_num&order_da=d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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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현 간증 글(펌)

연락처 011-402-0324. khbaik@kongju.ac.kr

저는 뜻하지 않은 사고로 2살 때 곱사등이가 되어서 50평생을 열등감을 가지고 살아 오던중 2005년 2월 4일 부흥회(장향희 목사님 인도)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치유를 받고 몸과 마음이 건강한 새 사람이 되어 말할 수 없는 큰 기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오리면서 이 글을 씁니다

– 출 생 / 1951년. 충남 공주

– 연락처 / 011-402-0324. 041-850-8318(연구실)

– 학 력 / 서울음대 및 동대학원 졸업. 비인국립음대수학

이탈리아 아 르 츠 아카데미 수학

– 현 재 / 국립공주대학교 음악교육과 교수(1980년부터 -)

성곡오페라단장(1991년 -)

오페라 이순신 제작자(1997년 -)

대전중앙감리교회 권사(1994년 -)

– 교회력 / 공주제일감리교회 첫 출석(1968년)

그후, 서울숭덕교회, 서울영락교회, 서울초동교회

서울충현교회, 대전목원대학교회

오스트리아 비엔나 할브가세 교회의 독창자 및

찬양대 지휘자역임

– 수 상 / 국무총리상(1995년) 충청남도문화상(1998년)

화관문화훈장(2002년)

– 업 적 / 한국의 창작오페라 이순신을 유럽 오페라무대에 진출

<간증글>

————고난의 시절

본인은 2살 때, 8살 된 친척의 등에 업혀 높은 곳에서 떨어진 후 척추골결핵으로 몸을 다친 후 등굽은 곱사등이가 되었습니다. 대학교 1학년 때인 1971년도에는 24시간에 걸친 척추에 달라붙은 화농부위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으면서 24시간 동안 투여된 수혈과 함께 침투한 B형과 C형 간염바이러스로 인하여 간염이 발생된 후 1994에 공무원 신체검사에서 발견된 간염을 치료받아왔으며, 선천적으로 오른쪽 눈까풀의 신경이 죽어 있는 안검하수(먼산바라기)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어릴적에는 몰랐지만 사춘기가 되면서 등이 굽은 것을 알았고 이로 인하여 저 만이 알고있는 마음의 상처가 수없이 많았으며 이로인하여 부모와 친척은 물론이고 하나님까지 원망하면서 살았습니다. 국민학교 시절까지는 동네 아이들과 함께 천진난만하게 생활하였지만, 사춘기가 되면서 남들의 수군거리는 모습을 통하여 부끄러움을 알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나는 열등감을 감추기 위하여 겉으로 성실하고 근면한 척 하면서 태연하게 살았지만 마음속으로는 분노가 깊게 자리 잡고 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학교생활이나 일상생활 그리고 교회생활에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책상이나, 바닥에 앉아서 수업을 받거나 예배를 드리는 일들이 저에게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무척이나 어려운 시간이었으며 항상 남이 나를 보고있다는 사실에 늘 경계심을 가지고 날까롭고 예민한 모습을 버릴 수가 없었습니

남들이 운동을 할 때, 야유회를 갈 때 나는 그 자리를 피하여야 했으며, 항상 속으로는 고독을 즐기면서 어두운 사색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서울음대 1학년 때에는 몸이 너무도 아파 지도교수님에게 마지막 편지를 드린 후 학교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숙집에서 아침에 잠을 깬후 밥상에 가기까지 2시간이 걸리는 적도있었습니다. 다리가 말을 듣지않고 횡격막이 찢어지듯이 아팠었는데 그 당시에는 내가 몰랐지만 밤새에 척추마디마디에 화농균이 고여서 전신의 신경을 누르고 있었음을 나중에 병원에 입원하여 알게되었습니다도

또한 39Kg의 왜소한 몸으로 성악을 전공하기에 어려움이 컸었고, 다른 학생들 앞에서 성악을 연주하는데 괴로움이 컸었습니다. 남들처럼 1시간, 2시간씩 피아노 연습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수업이 많았던 날에나 비가 오는 날에는 교수님 모르게 강의실을 나와 벤취와 나무, 담장에 저리고 시린 등을 마사지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교수님께 하직인사를 편지로 드린 후 죽음을 생각하면서 버스를 탄것이 도착을 하고보니 시골집에 도착을 하게되었습니다

집에 도착하여 몇일동안을 자리에 누운후, 어릴적에 침술로 나를 치료해주셨던 한의원 할아버지 선생님을 찾아 아픈몸을 이끌고 버스를 타고 인천에 가서 한달동안 치료를 받은적도 있었으며, 무당을 불러서 나의 옷을 모두 벗겨놓고 뾰족한 솔잎으로 온몸을 찌르면서 날카로운 칼로 나의 배와 등을 이리저리 문지르는 푸닥거리도 했었습니다

그렇게 한 두 달이 지난 1971년 여름, 24시간에 걸친 척추수술을 하고나서 1년 동안 병상에 누워있는 동안에 2차례에 걸쳐서 호흡이 중단되는 죽음의 순간을 체험하기도 하였으며 더운 여름에 몸통을 석고로 기부스를 한 채 살았던 6개월은 정말로 힘든 시기였습니다

병원에서는 수술도중에 죽을수도 있으며, 살더라도 하반신이 마비될것이라고 했지만 하나님 은혜로 기적같이 수술이 잘되었습니다

1972년 퇴원 후 다시 복학하여 1976년에 서울음대 성악과를 졸업허였으며 곧장 대학원까지 마치었지만 그동안에 등이 굽고 키가 적다는 이유로 학내음악회는 물론이고 외부의 여러 음악회 출연에서 제외되는 수모를 겪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지금 생각하여보니 제가 아무리 어려운 고난의 시간이 있었다 하여도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 제 마음을 아시잖아요, 제가 어떻케 살아갈 수 있나요, 하나님 저를 지켜주세요 라고 기도를 할 수 있는 믿음이 있었다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아들아 슬퍼말라, 내가 너를 지키리라, 먼저 나를 찬양하고 나를 의지하거라 라고 말씀을 주셨을 것이라고 이제 회개하는 마음으로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정말로 힘든 시간이 많았습니다. 제가 마음을 편하게 지니고 있었던 시간과 공간은 화장실에 있었던 그 시간이 유일한 피난처였습니다

———– 겉과 속이 달랐던 삶

사춘기가 들어 제가 제 모습을 발견한후 부터 저는 수치심을 갖게되었으며, 50여년을 살아오면서 저 만이 간직해온 수 많은 상처가 있었습니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알고나서 제 앞에 놓인 열등감을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방법을 익힌것은 나 자신을 위장하는 방법을 착제되었습니다

속으로는 분노와 원망이 짙게 깔려 있으면서도 이를 밖으로 분출하고 싶어도 그것자체가 저를 더욱 창피하게 만들것이라고 생각을 하게되었으며 머리를 써서 생각해 낸것이, 아니 본능적으로 배우게 된것이 있었는데 겉으로 예절바르고 명랑한척 사는것이 유일한 나의 표현이었습니다

이렇케 겉과 속이 다르게 살고 있던 나를 두고 학교 선생님들도 법이 없어도 살 학생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저를 칭찬하여 주셨지만, 저의 속마음은 절대로 그렇치 않았윱求?

겉으로 명랑하고, 예절바르고, 성실한 모습의 행동은 저는 마음과는 달리 나에게 닦아오는 열등감을 가리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습니다

그 결과 저는 진정한 우정과 마음을 나누었던 친구가 없었으며, 친구들과 사귀다가 마음 깊이 우정을 느끼게 되는 순간에 저는 저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기가 두렵고 싫어서 어느 선에서 제 마음을 감추고 나에게 닦아오는 친구로부터 멀어지려고 친구에게 의도적으로 차가움을 마음을 표하기를 스도없이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의 저의 삶은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찼으며, 겉으로만 온유한 척 살아온 거짓된 것이었습니다

————- 감사하지 못한 축복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저한 하나님으로부터 수 많은 축복을 받았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현재의 의사선생님들은 1950년대에 결핵균이 몸속에 들어갔다면 백발백중 죽었을 터인데 어떻케 살았는냐고 묻고있지만,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이 허락하신 좋은 부모님 덕분에 죽음의 고비에서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후 훌륭하신 선생님을 만나 좋은 가르침도 받을 수 있었고, 좋은 대학과 좋은 대학원을 마칠 수 있었던 것도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으면 저 같은 몸으로는 불가능 한 일이었습니다

1971년도 24시간에 걸친 수술(척추속에 고인 화농을 제거)을 받으면서도 병원에서는 수술도중에 죽던가, 살아도 하반신마비가 될수있다고 하였지만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과 자비로 신경이 마비되지 않고 살아났습니다

그후 저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27세의 젊은 나이에 대학교수가 되었고, 대학교수인 지금의 아내도 만나게 되었으며, 교수가 된후에는 곧바로 국비지원으로 가족과 함께 2년간 해외유학을 혜택받는 등 여러가지 면에서 하나님 축복을 많이 받았지만,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못하고 당연한 것으로 생각을 하면서, 내가 잘나서 다 그런것으로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나를 성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으면, 내가 더 잘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원망하였던 죄인이었습니다

대학시절에는 서울의 충현교회 ,영락교회의 독창자로, 그리고 오스트리아 유학시절에는 비엔나 할브갓세교회의 독창자로 부름 받았지만, 하나님께 영광의 찬양을 온전히 드리지 못하고 저의 울분과 슬픔을 위로하는 한풀이 찬양을 하였던 죄인이었습니다

또한 성가대 지휘자로도 직분을 받았지만, 온전히 충성치 못하고, 40여년에 걸친 예배생활에서 많은 목사님께서 수도 없이 외치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예수께서 못 박히셨다”는 말씀에 진정한 아멘으로 화답하지 못하였던 어리석은 죄인이었으며, 신체적으로 어려울 때, 하나님 앞에 나가 나의 어려움을 고백하지 못한 ,솔직하고 용기있는 자가 못되었던 어리석은 자였습니다

———- 내 자랑을 위한 오페라단 운영

1980년에 대학교수가 된 후에도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하고 열등감을 감추면서 위축된 삶을 살다가, 1991년부터 열등감을 가리기 위하여 인구 10여만 밖에 안되는 공주에서 오페라단(성곡오페라단)을만들어 전국공연을 하면서 내 자랑을 하기 시작하였으며, 1998년부터 창작오페라 이순신을 만들어 한국, 이탈리아, 러시아에서 공연을 하면서 해외공연 업적을 자랑하면서 오페라를 우상처럼 여겼습니다

오페라를 시작한 것은 오페라가 좋아서라기보다는 나의 열등감을 가리기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시작하였던 것이며, 명예와 돈을 벌기위한 목적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페라 이순신에 많은 축복을 주시어, 8년 동안(1998 – 2005) 90억에 가까운 돈을 모금하게 해주셨고 한국오페라 역사 최袈?이탈리아(2000년), 러시아(2003)공연을 허락하시었고, 이로 인하여 정부로부터 화관문화훈장까지 받게 되었지만 하나님께 감사는커녕, 더욱 크게, 더욱 멋지게 잘 해보려고 혈기를 부리다가 10억에 가까운 빚을 지고 행복하였던 가족의 행복을 다 망가트려 놓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모두 잊어버리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아내의 권면을 외면하였던 시절

아내는 오페라를 시작할 때부터 하나님께 먼저 기도하기를 권하면서, 올바른 신앙생활을 요구하였지만, 저는 눈앞에 보이는 것이 오페라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특히 오페라 이순신으로 인하여 많은 빚을 지고 나서도 “하나님 빚을 갚아주세요”만을 기도하였지 “하나님, 저의 불순종과 죄를 용서하여 주세요, 기도하지 못하고 시작한 저의 잘못을 용서하여주세요”를 간구하지 못하였습니다

또한 아내는 하나님이 주신 좋은 목소리로 먼저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권면하였지만, 저는 “성악가가 어떻게 쉬운 찬송만을” 부를 수 있느냐며 아내를 나무라기까지 하였습니다

오페라 이순신을 가지고 해외공연을 할 때에 저를 위하여 많은 분들이 기도를 해주었지만 정작 저는 하나님께 기도하지 못하고 모든 것이 제가 잘나서 되는 것으로 생각하며 교만의 극치를 떨었습니다

저는 중매로 만난 아내에게 나의 불구된 모습을 교묘히 숨기고 결혼을 하였던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지금까지 불편한 말이나 불편한 눈길을 단 한 번도 주지 않고 오히려 용기를 심어주고 기도로서 위로하여주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을 때 아내는 “하나님 백 교수가 몸이 불편한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어요, 이로 인하여 본인이 좋아하지도 않는 오페라로 혈기를 부리고 있어요, 백 교수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도록 하나님 도와주세요”라는 기도를 결혼 초부터 해온 것을 나는 후에 알았습니다

—————– 자살을 생각하였던 어리석음

많은 빚을 지고, 가족을 어둡게 해놓고 나서야, 저는 마지막 단계에 와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지만 빚 문제를 해결할 방도가 없었습니다. 정말로 부끄럽고 챙피하기까지 하면서 가족을 대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2004년부터는 모든 후원자들도 제 곁을 떠나기 시작하였습니다. 학교를 가도 동료교수나 학생들을 대하기가 부끄러웠으며 친구들을 만나기가 싫었습니다. 집에 가기가 어려워, 차안에서 잠을 자기도 하였으며, 차를 몰고 낭떠러지에도 가보았고 저수지 가에도 가보았지만 용기가 없어서 죽지를 못하였습니다

—————— 나를 부르신 하나님

2005년 2월 4일, 구정, 햇살이 가득한 어느 날 아침, 아내와 함께 방에 있었지만 빚 문제로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에 불편한 심정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때, 아내의 동료교수 한 사람이 아내에게 “최 교수 오늘 가까운 기도원에 부흥회가 있는데 지금 투병중인 이 권사를 데리고 가자”라는 전화를 하였습니다

아내는 전화를 끊고 친구인 이 권사에게 전화로 함께 기도원에 가자고 하였지만, 이 권사는 “나는 오늘 정기검진이 있어 못가니 두 사람만 가라”고 전화로 대화를 나누는 말이 내 귀에 들렸습니다

이때 나는 무의식적으로 아내에게 “내가 기도원에 가면 안돼?”라고 묻게 되었습니다. 평소 기도를 하라고 해도 거역하였던 나, 찬양을 하라고 해도 거역했던 나, 새벽기도에 나가는 아내를 방해하였던 내가, “내가 그 곳에 가면 안돼?”라는 말을 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정말로 부흥회에 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부흥회에 간다고 하면 빚 문제로 아내와의 마찰을 조금이나마 피해갈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50%였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 갔다가 오면, 하루는 아들도 안보고, 부모님도 안 볼 수가 있을 것 같은 마음이 40%로 정도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나의 마음 깊은 곳에서 “내가 갈 곳은 그곳밖에 없잖아, 내가 지금 어디로 갈수 있단 말인가”라고 떨리는 감동이 일고 있었는데 그것은 제 마음 중에 10%로 안되는 적은 것이었습니다

이때 아내가 “왜 안되? 지금 가자”라고 했습니다. 나는 속으로 “내가 실수를 했구나, 정말로 가자고 하는데 피할 수는 없고 어떻게 한단 말인가” 라고 하면서 번민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이때 아내에게 “빨리 가자”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좋아서 빨라가자고 한 것이 아니라 “빨리 가서 벽에 몸을 기대고 앉거나, 기둥 앞에 앉아서 굽은 등을 감추고자”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날바닥에 무릎을 꿇고 2시간가량을 견딜 때 아파올 등줄기를 생각하니 다시 마음이 편치를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날 10%로도 않되었던 하나님을 향한 나의 마음을 사랑하셨던 것 같습니다

—————— 2005년 2월 4일, 하나님 치유시작

아내와 함께 기도원에 도착한 나는 어두운 마음으로 바닥을 향하여 시선을 두고 이날도 나는 “하나님 빚을 갚아 주세요”라는 기도를 하고 있었지만 아내는 내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도록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부흥목사(장향희 목사님)님께서 저희들을 포함하여 부흥회 참석자들을 바라보시면서 “앞을 보세요, 십자가를 바라보세요,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를 여러 차례 주문하시면서 “예수의 피로 죄사함 받았다”를 외치라고 하셨고, 저는 순종하는 마음으로 따랐습니다

잠시 후 솜사탕 같은 것이, 아니 바람결 같은 것이 저의 오른쪽 옆구리를 누르는 것을 느꼈지만 나는 그것이 나의 착각에서 느낀 일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잠시 후 약간 더 세게 나를 누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이때에도 나는 누가 나를 만졌나보다 하면서 주위를 보았지만 아무도 나를 만진 흔적이 없어서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오늘은 내가 이렇게 몸이 불편해 지는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습니다

잠시 후, 이번에는 종전보다 약간 간한 만짐이 있었는데 이때 저는 나도 모르게 “할렐루야 아멘”을 나지막하게 외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저의 자아가 외친 것이 아니고 그 어떤 것(성령)의 인도함에 의하여 제가 입을 열게 되었던 것입니다

제 입에서 “할렐루야 아멘”이 떨어진 후 곧바로 저의 팔, 다리, 고개, 어깨, 허리, 등이 제 뜻과는 달리 꺾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저는 50년동안 시리고, 저리고, 불쾌하였던 등줄기가 시원하여 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으나 저는 처음 겪는 일이라서 두렵기 그지없었습니다

제가 두려운 마음으로 잠시 정신을 차리려할 때에 “두려워 마라, 내가 너의 굽은 등을 편다”라는 하나남의 분명하신 말씀이 들렸고 저의 몸은 다시 성령에 이끌리어 온 마다기 꺾이고, 비틀리는 현상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너무도 감사하고 고마웠습니다. 등의 시원함과 함께 굽은 등이 펴졌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하여 호흡까지 동원하시면서 등을 피시면서 하늘에서 내린 하얀 빛이 저의 오른팔을 묶은 후 하늘로 당기셧습니다. 그리고 오른팔을 360도 회전을 시키시면서 그때에 생긴 팔의 각도를 이용하시어 등을 피시었습니다

———- 2005년 2월 5일, 새벽 6시. 내가 너의 등을 다 폈다

부흥회 첫날이 끝나고 집에 와 잠을 청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메스껍고, 어지럽고, 현기증이 나기 시작하였습니다. 1971년도에 수술할 때 감염되어 1985년부터 치료를 받아온 간염이 갑자기 문제가 된 줄 알고 큰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오페라로 인하여 생긴 빚에다가 아프기까지 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을 하면서 두 손을 가슴에 얹고 잠을 청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두려워 마라 내가 너의 굽은 등을 다시 편다”라고 하신 후 저를 반듯이 뉘워 놓고 팔과 다리의 각도를 변화시키시면서 성령의 힘과 팽창된 호흡을 등 뒤로 밀어 넣으면서 계속하여 등을 펴주시었습니다

양손의 두 엄지손가락으로는 저의 두개골 밑을 강력하게(살이 탈정도로)압박을 하면서 문지르게 하시면서 50여년동안 긴장하여 살면서 생긴 어깨와 목의 살덩어리를 모두 제거시켜주신 태어날 때부터 없었던 오른쪽 눈까풀의 신경을 새롭게 만들어주셨습니다

잠시 후, 하나님은 예리한 면도칼로 저의 정수리를 가르시고 검은색의 대못만한 쇠막대기를 뽑아주셨는데 이때 정말로 아팠습니다. 나는 너무도 아파서 “하나님 그만 하세요, 너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어요”라고 외쳤는데 이때 하나님은 저에게 “예수가 너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힐 때의 아픔을 생각이나 해보았느냐”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이때 하나님께 너무도 죄송하여 “할렐루야 아멘”을 외쳤고, 이후 곧바로 저의 아픔은 모두 사라지고 하나님께서는 저의 머릿속에 있던 못을 두개나 뽑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계속하여 저에게 “너의 죄가 무엇인지 아느냐”를 물으셨고, “잘 모르겠습니다”로 답하는 저에게 “나를 너의 아버지라고 네가 네 입으로 외치지 않았느냐”라고 꾸짖으셨습니다

제가 “하나님 잘못했어요, 이제부터 하나님을 저의 아버지라고 제 입으로 부르겠어요”라고 답을 하자만자 하나님께서는 그토록 좋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50년 동안 너무도 마음이 아팠구나, 이제 내가 너를 위로하노라” 하시면서 “나를 찬양하라, 그리고 널리 알려라”는 말씀과 함께 “자 이제 너의 굽은 등을 다 폈다”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새벽 6시, 눈물 코물로,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옷을 벗고 거울 앞에 서서 보니 정말로 굽었던 등이 펴졌습니다. 할렐루야. 저는 곧바로 옆방에서 자던 아내를 깨웠고, 아내도 나의 굽은 등이 없어진 것을 보고 절규에 가까운 “하나님이 함께 하셨어요”를 외쳤습니다. 그 날 밤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의 간염도 다 고쳤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음날 새벽 4시, 방안에 상상 할 수 없는 큰 소리가 일었습니다. 나는 전쟁이 난 줄 알고 발딱 일어섰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성경을 펴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이에 저는 곧바로 성경을 폈는데 히브리서 4장 12절 “하나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영과 혼과 골수와 뼈를 쪼개신다”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너무도 감사하도 가슴이 벅차, 집 앞에 있는 교회(대전중앙감리교회)에 나가 맨 앞자리에 앉아 십자가를 바라보는데 흘러내리는 눈물과 콧물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이때 하나님께 “왜 저의 등을 펴주셨어요, 하나님, 이 죄인이 무엇을 잘했다고 등을 펴주셨어요, 대답을 해주세요”, 를 수도 없이 외쳤는데, 하나님은 “나의 아들이기 때문이었노라”라고 대답을 하셨습니다

————- 정말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 이제 하나님이 좋아,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제 저는, 저를 치유하시면서 당신을 찬양하라고 하신 나의 하나님께 순종하년서 감사와 영광의 찬양을 드립니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까지 정말로 감동의 찬양을 할 것입니다. 찬양을 하면서 하나님이 “왜 저의 등을 펴주셨는지, 어떻게 펴주셨는지, 그리고 하나님은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만방에 알릴 것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 하나님이 주신 건강에 감사하세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건강을 주신 것 만 가지고도 감사할 것이 너무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상의 요구는 욕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온전히 나갈 때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 이상으로 모든 치유와 축복 그리고 위로를 하십니다. 좋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백기현 교수 찬양 사역 동영상 안내 : www.sdcc.or.kr (서울 중앙신당교회 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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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 인사드립니다..^^ 최정원 webmaster 2007.04.16 940
220 산타바바라로 갈 예정인데, 아이와 관련하여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강태곤 webmaster 2007.04.08 1016
219 거미줄 제거 박형동 webmaster 2007.02.10 1057
218 보고 싶습니다 김미자 webmaster 2006.11.28 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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