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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교나눔의 장

한국을 사랑한 선교사(마포 삼열) 펌 샬롬편집부

2007-11-19 21:05:39 115
평양을 한국의 예루살렘으로 변화시킨 한국교회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마포 삼열(Samulel Austin Moffett)선교사 님의 4번째 아드님인 Dr. Howard Moffett (90세)과 부인이 저희 동네에 사셔서 몇번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평양에서 태어나 아버지에 이어 한국을 너무나도 사랑하시어 미국에서 의대를 졸업한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셔서 오랜 세월 대구 동산병윈 원장으로 의료 선교를 하시다 15년전 한국에서 은퇴하시고 이곳 carpinteria에 사시는 분입니다. 마포 삼열선교사님의 삶을 자세히 알고자 샬롬편집부에서 Dr. Howard Moffett와 interview해 볼까 생각도 한 적이 있었는데 …….
병원에 입원하신 Dr. Howard Moffett님의 여호와 라파가 임하여서 빠른 회복을 기도하며…….
…………………………………………………………………………………………………………………중앙일보에서 퍼옴

Samuel Austin Moffett 는 남가주 Monrovia 시의 한주택 차고에서 1939년 숨을 거두었다. 그나마 지인의 배려로 집 차고를 개조해 말년의 삶을 의탁했던것이다.
—한국의 교회사를 이야기 할때면 첫장에서 마주칠 만큼 커다란 선교의 거목이 보낸 마지막 여정으로는 너무 쓸쓸한 길이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한국 생각만 했어요.
일본의 압제로 고통 당하는 한국 사람들을 위해 밤낮으로 기도 하셨죠.
그리고 반드시 한국으로 돌아가 그곳에 묻히시겠다는 게 아버지의 마지막 소망이셨읍니다. Santa Barbara 인근에 사는 4째 아들 Howard Moffett 은 눈시울을 붉히며
아버지의 유언을 전했었다.

이날(4월 20일, 2006) Howard 박사 저택에서 멀지않은 Capenteria 묘지에서
Moffett 선교사 유해 이장 예배가 열렸다. 화장한 유해를 한국으로 이장하여
장로교 신학대 캠퍼스에 묻기 위해서다.

장신대는 5월 9일 개교 105주년 기념일을 맞아 도서관 앞동산에 마련한 묘지에 안장할 예정이다. 묘지 잎에는 그의 반신상이 세워진다.
설립자이며 초대 교장인 마포삼열 이라는 한국 이름이 영어와 함께 새겨진다.

그리고 부인 Alicia Fish Moffett 와 함께 안장 된다.
일제의 탄압과 위협으로 가방 두개만 들고 쫓겨난지 67년 만의 일이다.

Moffett 선교사는 [평양 신학교] 를 세워 조선 최초의 목사들을 배출 했다.
또 그는 [숭실 학교] 를 William M. Baird 와 함께 세우고 교장을 지내는등 교계와 사회 안팎에서 조선의 미래 지도자를 키우는 일에 전념 했다.

평양 외국인 학교 옆에 자리 잡은 그의 한옥집은 당시 동북아 선교사들의 중심 가교 역활을 했다. 3.1운동 때는 장로교 총회장을 맡아 독립운동을 지지하고 미국에 일본의 만행을 알리는일에 앞장 섰다.

3째 아들 Samuel Hugh Moffett 목사는 한국 선교사로 장신대에서 학생을 가르치며
학장도 역임 했고 Prinston 신학 대학원 교수를 거처 지금은 석좌교수로 있다.

4째 아들 Howard 는 의사로 평생 한국에서 의료 선교를 펼치며 대구 동산병원을 오늘의 모습으로 성장 시킨 장본인이다.

아버지는 한번도 선교사가 되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어요.
아버지께서 항상 한국을 편들고 힘을 다해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죠.
우리도 자연스레 대를 이어 한국 선교사가 된겁니다.

–때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이제 Moffett 선교사는 그리도 꿈꾸던 한국으로 돌아 간다. 제자들은 그의 묘소를 둘러 보며 세계열방을 섬길 꿈을 새기고 다질것이다.

……………………………………………………………………………………………………………..

한국을 사랑한 선교사

마포삼열(馬布三悅, Samuel A. Moffett)

마포삼열은 26세의 나이로 한국에 건너와 45년동안 수많은 교회를 개척하고 초기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을 양성한 한국교회의 아버지입니다.

Ⅰ. 사명의 땅 한국 (Korea)

마포삼열은 1864년 미국 인대애나주 매디슨에서 출생하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포목상을 경영하였으며 청교도적인 엄격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어머니는 좀 자유 분방하였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경건한 신앙을 배웠으며 11세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였습니다. 마포 삼열은 하노버 대학 신학과에 입학하였으나 대학원에서는 화학을 전공,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그러나 박사과정을 마친 뒤 그 의 생각은 달라졌습니다. 그는 자신의 일생을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데 투자하기가 아까 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미국 보수주의 신학의 요람이자 많은 해외 선교사를 길러 낸 매코믹 대학에 1885년 입학하였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한국 선교사로 일했던 베어드 (W, M. Baird)와 함께 공부하였습니다.

당시 한국의 시대상황을 설명한 백과사전의 기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한국은 중국 에 소속된 하나의 작은 왕국이며 깊은 산 숲속에는 호랑이 곰등이 득실대고 사람들은 미개한 야만인들이며 도전적인데다 해적과 같고 일부다처제가 일반화되있다. 또한 부패 한 불교가 왕성한 종교적 나라이다. 외국인의 출입은 허용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알려 져 있지않다. 또한 최초의 선교사였던 의사 알렌의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거리거 리에는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쌓여있고, 파리, 모기, 날파리들이 떼를 지어 득실거리고 있었으며, 더러운 개천에는 온갖 병균이 들끓고있다. 또한 집집마다 파리, 빈대, 벼룩이 없는 집이 없다. 천연두, 매독, 회충등은 흔해빠진 병이었고 종기나 무좀같은 피부병에 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걸려있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포삼열은 이러한 한국의 실정을 알고도 기도 중에 한국을 선교지로 결정하였습니 다. 그는 한국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의 땅으로 영접하고 한국백성과 한국을 위해 자 신의 삶을 온전히 희생하였습니다. 그는 1889년 4월 15일에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로부 터 한국선교사로 임명되었습니다. 1890년 1월 인천 제물포를 거쳐서 서울 마포강변에 역사적인 첫발을 내디었습니다. 처음 6개월간은 한국어를 공부하였고, 언더우드로부터 경신학교의 전신인「예수교학당」을 인수하여 교육사업에 몰두하였습니다. 1893년부터 평양을 중심으로 평안남북도, 황해도 일대를 순회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 고 곳곳에 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1901년 평양에서 신학교육을 시작하였으며 1904년에 정식으로 평양신학교 교장(1904∼1924)에 취임하였습니다. 그는 한국인을 각별히 사랑 하여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격려하고 독립의 성취를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또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끝까지 믿음으로 이겨냈습니다. 1919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제8대 총회장으로 선임되어 혼란기에 처한 한국 교회를 이끌어가는 수완을 발휘하기도하였습 니다.

Ⅱ. 평양을 제 2의 예루살렘으로…

1893년 10월 마포 삼열이 한국에 온지 9개월만에 평양 개척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개척당시 평양은 인구 약 10만명의 도시였으며 복음의 불모지였습니다. 마포 삼열은 한 석진과 함께 최치향이란 사람이 경영하는 여관에 숙소를 정하고 여관 손님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여관주인 최치향은 술꾼이었으며 도박과 색을 즐기는 사람이었 습니다. 그러나 마포 삼열과 가까이 지내면서 점점 변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성경을 공부하고 가장 확실한 신자가 되었습니다. 마포삼열은 석달동안 낮에는 거리에서 밤에는 사랑방을 찾아다니며 전도했습니다. 그리고 주일 아침에는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처럼 사랑방전도를 통해 3개월 후에는 7명이 세례를 받게 되었습 니다. 그런데 다음해 5월, 평양교회는 큰 시련을 겪게 되었습니다. 당시 평양감사는 국 법을 어기고 양놈들이 전하는 사교를 전파하는 자들을 용서할 수 없다는 지엄한 호령 과 함께 예배를 보고있던 7명의 신도들을 포박하여 끌고 갔습니다. 그들 중 5명은 다시 는 예수 안믿겠다고 말하여 풀려났으나 한석진과 김창식 두 사람은 끝까지 버티다가 순교할 지경에 이렀습니다. 마포삼열은 난감한 지경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양들이 죽으면 함께 죽겠다는 마음으로 붙잡힌 양들을 구해내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뛰어다녔습니다. 그 결과 고종황제의 칙명을 받아내었고 위기에 빠진 두 양들의 생명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한번은 이기풍이란 깡패 청년이 친구들을 동원하여 마포삼열이 살고 있는 방 창문으 로 돌을 빗발치듯 던져 넣었습니다. 그러나 집안은 고요할 뿐이었습니다. 그 후 그는 장터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설교를 하고 있는 마포삼열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오 기가 생겨습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돌을 집어 그에게 던졌습니다. 날아간 돌은 마포 삼열의 턱을 정통으로 맞추었고 그는 피를 흘리며 쓰러졌습니다. 그러나 마포삼열은 이 청년을 향해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아습니다. 마포 삼열은 이미 그를 예수님의 사랑으 로 용서하였습니다. 이때부터 돌을 던진 이기풍의 마음 속에는 두려움이 생기기 시작했 습니다. 그는 마포삼열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어느날 그가 죄의식으로 괴로워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순간 기풍아! 왜 나를 미워하느냐? 는 음성이 가냘프게 들려왔습니다. 그는 마침내 마포삼열을 찾아가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였습니다. 그 후 이기풍은 변화되 어 초대 7인 목사중의 한 사람이 되었고 제주도 개척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도 제주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돌팔매에 맞아 쓰러진 적이 있다고 합니다.

이처럼 마포 삼열의 사랑과 희생으로 인하여 평양개척역사는 폭발적으로 성장하였습 니다. 미국 북장로회의 한국 선교 보고서에 따르면 평양에서 일어난 복음의 불씨는 점 점 번져서 7명의 세례교인으로 시작하여 1949년에는 신도수가 70,000에 이르고 세례교 인 수만해도 25,791명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는 어떤 선교역사에서도 그 유 래를 찾아볼수 없는 아름답고 놀라운 일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포삼열은 한국의 북서지역 개척자로서, 특히 평양을 한국의 예루살렘으로 변화시킨 장본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또한 한국 장로교회의 초석을 놓았고 우리나라의 기독교 교 육과 문화발전에도 많은 공헌을 하였습니다. 이와 함께 한국의 독립과 발전에도 남다른 관심을 기울인 모습이 역력합니다. 다음은 1919년 3월 17일 일본의 아사히 신문의 기사 내용입니다.

외양으로는 그들(선교사들)이 사랑과 자비를 공헌하지만, 그들의 마음 속을 완전히 들추어 보면 술계와 탐욕으로 가득차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복음전도를 위하여 한국에 와있는 듯이 가장하고 있으나 정치적인 혼란을 은밀히 충동하고 있다. …그 무리의 괴수는 마포(마포삼 열)이라는 미국 선교사이다. 기독교인들은 예수께 복종하듯이 마포의 말을 잘 듣는다. 이곳이 지 금 일어나고 있는 봉기의 중심지이다. 그곳은 서울이 아니라 평양이다. ― 「평양 서문밖의 죄 악촌」중 [朝日新聞] 1919년 3월 17일자

이를 통해 3·1운동 당시 마포 삼열이 지닌 한국인에 대한 공감과 한국인에 대한 사 랑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마포삼열은 한국인들을 자기민족처럼 사랑했습니다. 그는 한 국인들과 가까워지고자 한국 고유의 예법을 익히고 한국음식을 즐겨먹었습니다. 그는 어디가든지 한국인처럼 침밀감을 느끼게 했습니다. 이런 그를 한국사람들은 마포 목사 님 이라고 부르기며 아버지처럼 섬겼습니다. 그는 이렇듯 어느 한국인보다도 한국사람 들과 한국을 위해서 많은 공헌을 했기 때문에 1966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공로훈 장과 문화훈장을 수여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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